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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 달 살이 그 후

보이지 않는 짐 정리와 중랑천 산책

by 눈떠! 2023. 9. 1.
8월 28일.
집으로 돌아 온지 벌써 2주가 지났다.
 
모든 짐들이 대부분 정리가 되어 자기 자리를 잡고 안정되어 간다. 이직 버려야할지 말지 결정을 미뤄둔 짐으로 아내의 지청구를 듣기도 하지만 많은 것들이 차례 차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 집의 한부분으로 녹아들어간다.
이제는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 아닌 보이지 않는 곳을 정리할 때다.
옷장 속, 책상 위, 서랍 속, 책장, 신발장, 여기저기 만들어 놓은 수납장등을 쓸모 있게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
정리한다는 것은 분류하고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일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분류하고 쉽게 찾아 쓸 수 있게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일은 훨씬 손이 많이 간다.
 
거실의 서랍 속에는 해열제, 두통약, 파스, 소독약, 일회용 반창고, 압박붕대, 연고 등 의약품과 체온계, 혈압계, 혈당계등 의료기구, 풀, 가위, 스카치 테이프 , 봉투 등 학용품, 간단한 작업을 할 수 있는 드라이버 등 도구들, 윷놀이, 화투, 트럼프 등 놀이 기구, 부체 등을 서랍별로 분류해서 정리했다.
거실 에어컨 뒤쪽에는 조립식 서랍장을 놓고 마스크(코로나 초기 줄 서서 몇 개씩 밖에 살 수 없던 것이 몇 박스나 되어 보관하기 조차 곤란하게 됨), 전선과 케이블, 겨울 방한용 장갑과 모자, 컴퓨터용 소모품과 하드, 케이블, 1,2kg 짜리 아령과 악력기 같은 간단한 운동기구, 안마기, 하모니카와 단소등 작은 악기를 서랍별로 넣어 두었다. 더 자세히 살펴 쓰지 않을 것은 버리거나 중고시장에 팔아야 할 것 같다.
 
문제는 내 방의 가운데 장에 쌓여 있는 물건들이다.
투명박스 네 개를 가득 채우고 있는 물건들은 참으로 난감한 것들이 많다.
우선 돌아가신 조상님들 사진을 넣은 액자는 설, 추석 명절과 기일 제사 때나 쓰는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절대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물건들이니 보관하기가 만만치 않다. 함부로 다를 수도 없고 깨끗한 곳에 보관해야 하지만 자주 쓰지는 않으니 장소 선정이 까다롭다. 옛날같이 집안에 사당이 있으면 좋으련만 아파트에서는 기껏해야 옷장 한 구석이니 죄송스럽기도 하다.
 
앨범도 그렇다. 요즘이야 사진을 뽑지 않고 파일로 클라우드나 하드에 저장하지만 예전에는 포즈잡고 찍어 인화해서 사진첩에 정성스럽게 붙여 보관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 군대, 직장 생활하면서 결혼하고 아이들 키우면서 찍어 만들어놓은 앨범이 십여권이 넘으니 참으로 처리하기 곤란하다. 아내와 아들들은 버리라고 하지만 나는 차마 그럴 수 없다.
사실 자주 보지도 않고 지나간 과거이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우리 가족의 역사를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죽은 후 태워버리거나 버리더라도 살아있는 동안 불편한 짐이지만 집 구석진 한 귀퉁이 책꽃이 맨 아래 한쪽 끝에라도 지니고 갈 생각이다. 나도 안타깝다.
 
그외에도 이것 저것 잡동사니가 많다.
예전에 쓰던 카메라, 삼각대, 축구공, 농구공, 배구공, 자전거 헬멧, 심지어 대학 태권도 동아리 시절 입던 도복까지.
아내는 내가 물건을 버리지 않는 심한 정신병에 걸린 환자라고까지 이야기하곤 한다.
그래서 가끔은 치료차 내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서랍째 버리기도 한다. 당연히 속상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사실 거의 사용하지도 또 들여다 보지도 않는 물건을 쌓아 놓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살아 온 흔적이고 한 때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을 매몰차게 버리지 못하는 것 또한 나 자신이니 안타까울 뿐이다.
아쉽지만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을 지닌 환자랑 사는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밖에.
 
집안 정리와 상관없이 저녁 산책은 계속 이어졌다.
특히나 비가 오거나 주말같이 중랑천 둔치에서 하는 에어로빅이 없는 날은 의정부 초입까지 아내와 걷는 산책은 집으로 오자마자 다시 시작됐다. 비가 너무 많이 와 산책길을 폐쇄하지 않는 한 우산을 쓰고라도 걷는다.
도봉산과 수락산은 좌우에서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준다. 
한 달 동안 산책길 자전거 도로 야간 표지판이 서울쪽에 새로 만들어졌다.
의정부와 경계에서 정확하게 끝나는 것을 보고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같은 대한민국에 살아도 어디에 사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우리나라는 많은 것이 서울, 그것도 잘 사는 동네 위주로 정책이 입안되고 실행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교육, 의료, 주택, 교통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고 살아갈 용기와 기회를 주는 정책이 더 많이 입안되고 실행되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
약자에게 주어지는 기회와 혜택은 결국 보통의 많은 사람들과 나아가 모든 국민들에게 주어지는 권리가 된다.
그 대표적인 시설이 지하철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일 것이다.
장애인들의 싸움으로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활용하고 있는가?
일부가 아닌 많은 사람들을 위한 여러 시설들이 개선되고 확장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그런데 쓰이는 세금이라면 기꺼이 더 낼 수 있다. 내가 부자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사실 부자가 세금을 더 내야하는 이유 중 하나가 세금으로 건설된 많은 공공시설을 누가 더 많이 이용하는가만 살펴보이도 금방 알 수 있다. 고속도로, 항만, 공항, 유원지, 박물관, 병원을 누가 더 많이 활용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집에 오니 좋다.
특별한 일 없이 하루하루 일상이 흘러가는 것이 소중하고 고맙다. 어디에 있든 이제 내게는 모든 일들이 소풍이다.
하늘에는 구름이 흐르고 길 가에는 풀들이 자라고 따가운 햇볕 속에서도 매미며 풀벌레들이 운다.
산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님을 깨닫고 더 가지려말고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갖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중요한 열쇠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더 가지려면 그만큼 자신의 무언가를 희생하고 분투 노력해야 한다.
삶에서 거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자신의 결정에 댓가를 치를 각오와 실천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지금 내 모든 것에 만족한다.
어쩌면 내가 한 노력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지 않나 싶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고 주어진 모든 것을 고맙게 받아들이게 하소서.
욕심부리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며 가진 것에 만족하고 평화롭게 지내도록 도와주소서.
가족과 친구들, 지인들을 위해 그리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제 마음을 붙들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