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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다낭 여행

베트남 다낭 여행 1일차

by 눈떠! 2024. 2. 6.
2024년 2월 2일. (베트남 다낭 여행 1일차)
대학 시절 동아리(태권도부) 친구들 8쌍이 부부 동반으로 베트남 다낭에 4박 5일 여행을 왔다.
78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태권도부에 들어 속칭 빳다 맞아가며 함께 땀 흘리며 운동한 친구들이다.
입학 동기생들이 거의 6,70명이 되었었지만 끝까지 운명(?)을 같이 한 친구들 8명이 남았다.
졸업을 하고 직장을 얻어 각자 다른 삶을 살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나아 키우면서도 서로 안부를 묻고 연을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는 나처럼 정년 퇴직을 하고 손주들 보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또 다니던 직장에서 은퇴를 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친구도 있다.
어찌 되었든 자식들을 하나, 둘 짝 지워 보내며 우리끼리 여행이나 가보자고 해서 따뜻한 남쪽 나라 베트남으로 왔다.
 
새벽 5시 30분에 집을 나와 인천공항 버스를 타고 6시 50분 쯤에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카페 라테 한잔과 샐러드, 샌드위치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다. 비행 중 먹을 점심으로 샌드위치 하나를 포장해 가방에 넣고 여행사와 약속한 장소인 공항 3층 N 카운터에 갔다. 정시에 친구들이 모두 모여 왔다.
여행사에서 일정표와 주의 사항을 듣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 출국장으로 나갔다.
아내와 출국장 한 바퀴 돌고 10시 10분에 탑승을 완료했다. 베트남 다낭까지 약 5시간이 걸린다고 기장의 방송이 흘러 나왔다. 비행기 타기를 어려워하는 아내를 다둑이며 베트남 시간으로 오후 2시 조금 넘어 다낭 공항에 도착했다.
서울의 날씨에 비하면 이곳의 날씨는 겨울 이라고는 하지만 조금 더웠다.
제비가 강남 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공항에 도착하니 여행사 직원인 앳된 청바지 차림의 베트남 아가씨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귀엽고 발랄한 우리나라 젊은이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젊은 이다.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지만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운 그런 곳은 아니었다.
처음 수학여행을 인솔하여 가 본 중국에서도 느꼈지만 나이든 우리들 머리 속에 그려지는 빨간 나라의 이미지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여기서도 새삼 느꼈다.
물론 나그네인 내가 정확히 말하긴 어렵고 공산당 일당 독재인 민주 국가는 아니지만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 이었다.
장사를 하고 회사를 다니고 젊은이들은 연애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 사는 곳 이다.
길거리 곳곳에 빨간 바탕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깃발과 역시 빨간 바탕에 노란 별이 크게 그려진 베트남 국기가 펄럭이는 게 큰 차이라면 차이다.
수많은 오토바이 행렬도 독특했다. 젊은 남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오토바이를 함께 타며 데이트를 즐기는 것 같았다. 어느 곳에서나 젊음은 가난해도 아름답다.
다낭 해변가의 길거리 식당에서 베트남 커피와 아보카도 주스를 마셨다.
이곳에서 3박 4일 우리 일정을 안내할 한국 여행사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트남 최대 불상이 있다는 영응사를 방문했다.
영응사에는 65m의 해수 관음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모셔져 있는 곳으로 베트남 전쟁으로 죽은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관광객으로 절 전체가 하나의 공원 같았다.
베트남 전쟁 막바지에 패망한 월남을 탈출하고자 작은 보트에 매달려 바다로 나간 수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지금은 평화롭게 고기 잡는 배들이 떠있는 저 바다에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잠시 머리 숙여 그 영혼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우리나라도 전쟁을 겪었고, 또 휴전 중에 있음을 떠올리며 평화의 소중함과 우리나라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본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이렇게 아내와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다.
 
다음은 여행의 피로를 풀어 본다고 마사지 샾을 방문했다.
입구에서 우리나라 말로 환대를 받으며 아내 분들은 2층, 남자들은 3층으로 안내 되어 마사지를 받았다.
친구들 8명이동시에 한 방에서 안마 침대에 누워 20살이 안되어 보이는 여성들에게 안마를 받으니 온 몸의 근육이 부드러워지며 시원해졌다. 그런 한편으로 이 여성들은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조금 안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관례대로 2달러를 매너 팁으로 주니 우리말로 고맙다고 했다.
아래 층으로 내려와 내어주는 차와 코코넛 비스켓을 하나 먹으니 아내가 내려왔다.
 
다시 차를 타고 저녁으로 제육 쌈밥을 하는 한국 식당으로 갔다.
일행 16명이 모두 길게 앉을 수 있도록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 남자는 남자끼리, 아내들은 아내들끼리 앉아 식사를 했다.
음식은 맛있었고 더구나 친구들과 집에 돌아갈 시간 제약 없이 소주를 곁들인 만찬을 즐겼다.
베트남에서도 소주를 팔고 있었는데 소주는 약 만원 쯤 했다.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진하게 그러나 아내가 옆자리에 있으니 취하지는 않을 정도로 유쾌하게 즐겼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숙소인 메리나 빈 펄 다낭 리버 프런트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우리 부부는 1109호 실을 배정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3일 동안 묵을 방을 둘러보니 마음에 들었다.
욕실도 비교적 넓고 깨끗했으며 더블 침대가 놓인 침실도 넓고 베란다에서는 다낭 시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한강을 오가는 유람선과 용 다리, 대관람차가 불빛에 젖어 있는 야경이 볼만했다.
옷을 꺼내 정리하고 충전기를 설치하고 세면 도구를 꺼내 놓았다.
대충 정리를 끝내고 같은 층의 방을 배정 받은 희중이에게 강변을 산책하자고 전화하니 좋다고 해서 로비에서 만났다.
조심해서 길을 건넜다. 베트남 도로에서는 건널목에 신호등이 없고 사람보다 오토바이나 자동차가 우선이었다. 여기 저기서 빵빵거리며 거의 양보가 없는 도로였다.
 
강변에는 젊은이들 위주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맥주를 마시며 강변의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65세 이상이 17.5%로 초고령 사회로 접어든 것과 다르게 베트남은 약 1억의 인구 중 60세 이상이 8.2% 밖에 되자 않는 젊은 나라다. 베트남은 낀족이 85.7% 차지하고 있지만 54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며 53개의 소수 민족들은 주로 산, 고원 지역에 거주하며 소수 민족 우대 정책으로 화합 및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후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 있지만 경제를 자유 시장으로 풀어 놓은 영향으로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파병으로 은원 관계가 있었지만 지금은 베트남 경제에 가장 강력한 동반자로 또 박항서 감독, 한국 문화의 유행, 한국 관광객 덕분에 한국에 대한 국민 정서가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심지어 다낭 거리나 식당에는 경기도 다낭시 라는 플랭카드가 걸려 있기도 했다.
 
용 다리 근처까지 오니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우연히 이 곳으로 산책을 왔지만 매일 9시에 다리를 이루고 있는 용의 머리에서 불을 뿜는 모습을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외국 관광객 뿐 아니라 현지인들도 가족이나 연인끼리 그 모습을 보려고 모여들어 용 머리가 잘 보이는 자리는 이른 시간부터 사람으로 움직이기 힘들 정도다.
베트남 사람들이 타고 온 오토바이로 도로 가장자리는 발 디딜 틈이 없어 가뜩이나 복잡한 도로가 완전 난장판에 가깝다.
아무튼 우리는 운 좋게 그 구경을 잘했다.
불을 뿜는 광경을 본 후 용 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돌아오려고 용 다리에 오른 순간 용 머리에서 불이 아닌 물을 뿜어 대기 시작했다. 다리 아래쪽에서는 난데 없는 물 벼락에 또 한 번의 난리가 났다.
 
그날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걸었지만 다리 건너 반대편은 사랑의 거리라고 했다. 가로등이 하트 모양이었고 여기저기 벤치에 젊은이들이 쌍쌍이 붙어 있긴 했다. 다리 중앙에 이름 모를 상징물이 있는 다리를 건너 숙소로 돌아왔다.
 
이렇게 베트남에서 첫 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