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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다낭 여행

베트남 다낭 여행 3일차

by 눈떠! 2024. 2. 8.
2024년 2월 4일(베트남 다낭 여행 3일차)
 
오늘도 다른 관광객들보다 편하게 움직이려고 일찍 모이기로 하였다. 6시에 식사를 하고 6시 30분에 내려가니 우리 부부가 가장 먼저 로비에 도착했다.
잠시 후 가이드와 친구들이 모두 도착해 버스에 올랐다.
 
오늘 아침 나절에는 베트남 최대 테마파크인 바나힐스 관광이 잡혀있다.
바나힐스는 바나산 위에 지어진 놀이공원과 베트남의 모든 꽃을 볼 수 있는 플라워 가든, 그리고 프랑스 풍의 건물로 이루어진 거리로 이루어졌다.
 
입구에 내려 정문을 통과하니 잘 꾸며진 정원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회랑을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케이블카 선차장으로 올라갔다. 바나힐스의 케이블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다고 하는데 우리 일행은 8명씩 두 대의 케이블카에 나눠타고 한 20여 분을 주변의 경치를 보며 올라갔다.
계곡과 폭포, 그리고 울창한 열대 밀림으로 이루어진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며 아늑히 멀어지는 마을들을 바라보노라면 사람의 힘이 문득 무서워지기도 했다.
산 정상 근처는 지금도 테마파크 공사를 하고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골든 브릿지라고 이름 지어진 사람 손바닥처럼 생긴 기둥으로 받쳐진 반원형의 다리가 하늘에 걸려 있었다. 바닥이 투명이 아니어서 그렇게 무섭진 않았지만 그래도 하늘에 걸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주며 발 아래 산봉오리들이 보여 시원하고 상쾌했다. 일찍 출발한 덕분에 붐비지 않아 모두들 여유있게 사진을 찍었다.
 
공원은 프랑스의 지배를 오래 받은 영향인지 중세 유럽의 여러 도시를 흉내낸 건물과 동상들이 넓은 지역에 퍼져 산책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테마 파크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서 성당을 발견하고 들어가 보니 미사를 볼 수 있는 곳이 아닌 관광객들을 위한 모조품이었다. 그래도 오늘이 주일인데 미사에 참석못해 십자고상 앞에 잠시 무릎을 꿇었다.
놀이동산에는 가지 않고 친구들과 흩어져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 보니 로마의 트레비 분수 광장을 흉내낸 광장 앞에 모여 맥주를 한잔씩 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났다. 광장 한쪽의 무대에서는 한 서양인 악사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잠시 야외 식탁 의자에 앉아 박수를 쳐주니 좋아했다. 공연은 관객의 호응이 좋아야 신이 날 것 같아 우리 부부는 관람하는 모든 공연에 열성적으로 박수를 쳐준다. 모이기로 약속한 장소로 내려오는 길에 용규 부부와 함께 성당에 다시 들렸다. 용규 부부와 우리 부부는 성당에서 결혼을 하며 서로 결혼 증인을 선 사이다. 30여년 전 옛날을 기억하며 성당 안에서 증인 서는 사진을 찍고 나왔다.
 
테마파크 구경을 마치고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며 본 경치는 올라가며 본 경치와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세상은 한순간도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들은 다 각자 모습을 갖고 있으며 그 다른 모습들이 모두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자주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생각하곤 하는데 우리는 그저 다를 뿐이다.
맞고 틀리는 것은 학교 다닐 때 보는 시험지에서나 있을 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틀린 것은 없다.
그저 다르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생각할 뿐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이루는 서로 다른 소중한 하나 하나일 뿐이다.
 
버스를 타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비빔밥과 쌀국수를 하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동성 고등학교 식당보다 넓었고 많은 한국사람들로 붐볐다. 배식을 하는 뒷쪽 벽면에는 '경기도 다낭시 명동식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프랭카드가 걸려 있었다.
베트남 종업원들도 모두 간단한 한국말을 알아 듣고 말해 식사를 하는 동안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베트남 관광지 어디를 가든 어설픈 베트남 말보다 우리 말이 편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니 돈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되어 조금은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지 싶다.
 
식사 후 버스를 타고 다낭으로 돌아와 스트릿 전동차를 타고 미케비치 해변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했다.
베트남의 모든 도로에는 신호등이 없고 오토바이와 차들이 서로 빵빵거리며 다툼을 하듯 달렸다.
전동차도 그 사이에 끼어 달리는데 안전밸트나 기타 사고에 대비한 장치가 없어 조금을 불안했다.
실제로 이틀 동안 큰 사고는 아니지만 오토바이끼리 접촉 사고를 두 번 목격했다.
이 사람들은 사고가 나면 주변에서 도와주며 크게 다치지 않는 한 서로 다투지 않고 헤어진다고 한다.
해안에 내려 모래사장에 내려가 태평양을 바라보며 잠시 바닷바람을 맞으며 사진도 찍고 걸었다.
 
다음 일정은 아오자이 쇼를 관람이었다.
공연장 입구에서 화려한 아오자이를 입은 출연 배우들과 사진을 찍고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맥주나 음료수를 한캔씩 나누어 주었다. 가이드의 능력인지 중간 지점의 관람하기 좋은 장소의 좌석이 예매되어 있었다.
관객의 대부분이 한국 사람들이어서인지 양쪽 화면에 자막과 해설에 베트남어, 우리 말, 중국어가 사용되었다. 베트남 역사를 전통 의상인 아오자이를 주 소재로 전통 음악과 함께 다양한 아오자이 를 보여주는 패션 쇼 비슷한 구성이었다.
마지막 즈음에 세 명의 배우가 흰 아오자이 가슴에 베트남 국기, 태극기, 그리고 대만의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입고 한 명씩 걸어 나왔다.
태극기가 나올 때 가장 큰 환호성이 터져나왔는데 대만 국기가 나오자 뒷편 왼쪽에서 작지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나의 중국이라는외교정책을 펴는 중국의 위력 앞에 대만은 중화민국이 아닌 타이베이 오브 차이나라는 이름으로 국제대회에 참여하고 국기도 청천백일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나라에 와서 그 국기를 봤으니 얼마나 감격적이었겠는가? 학교 다닐 때 수련원에서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교육을 받으며 촛불의식을 하는 중 태극기를 보며 느낀 감동보다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일제 식민지 시절 태극기를 보는 감동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도 쉽게 넘보이지 않는 강한 나라를 조국으로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겠으나 대만 사람들은 어쩌면 눈물이 났을 것 같다. 어쩌면 베트남이 중국과 맞서 전쟁을 불사하는 나라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가 191개국과 수교를 맺고 있으며 여권 파워가 세계 2위인데 반하여 대만은 단 12개국과 수교를 맺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제하 우리의 독립을 강력히 지지해 준 중화민국을 실리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으며 1992년 단교를 했다. 그 때 대만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배신자라며 울분을 터트리고 눈물을 흘리며 명동 중화민국 대사관의 깃발을 내리던 신문기사가 기억난다.
 
지구상 수많은 나라들이 대한민국을 부러워한다고 한다.
K-pop 열풍과 영화, 드라마 등 문화 영역과 한국 음식, 한국 문화, 한국말을 알고 싶어 하는 외국사람들이 많으며 우리나라가 가보고 싶은 나라에 꼽아진다는 말을 듣곤 한다.
60대 친구들은 후진국에 태어나 선진국에 산다고도 한다.
사실 나도 옛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자유롭게 해외 여행을 하다니.....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세대차이가 당연했다. 아이들은 선진국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고 그들이 누릴 권리였었다.
부디 그들이 누리는 이 권리가 계속해서 지속되도록 격려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우리 어른들의 할 일이다.
옛날에는 어쩌구는 우리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꼰데짓인것이다.
 
친구들이 이발소가는 동안 아내와 나, 희중이 부부, 그리고 윤근이 집사람은 바닷가 차집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넓은 태평양을 배경으로 드넓게 펼쳐진 흰 모래밭 옆의 카페는 시원하고 운치가 있었다.
베트남이 세계 2위의 커피 생산국이라는 명성에 어울리게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더 향긋하고 달콤했다. 종류도 다양했는데 특히 카카오 커피는 아주 맛있었다. 열대 과일이 흔해서인지 주스도 다양하고 진하며 달콤했다.
 
다음은 다낭 중심을 가로지르는 한강(Song Han) 유람선을 타러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서울의 한강과 이름이 같지만 강 폭은 훨씬 좁았다.
첫 날 희중이 부부와 걸은 숙소 건너편 강변길이 사랑의 거리였는데 그 길 중간쯤에 선착장이 있었다.
유람선에 오르니 뱃머리에서 한 무용수의 태국 춤 공연이 있었고 가이드는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이라고 했다.
공연이 끝날 때 열심히 박수를 쳐주니 아내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해 주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들이키니 이곳이 고향같았다.
 
용다리를 지나 한바퀴 돌아 돌아온 후 배에서 내려 다낭 야시장을 구경했다.
주말이어서인지 관광객뿐 안라 베트남 젊은이들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저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물건을 사고 팔며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경이롭게 여겨진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지만 아름답고 위대하다. 그것도 사람들은 어쨋든 함께 어깨를 부비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버스를 타고 잠간 이동하여 용다리 머리 부근의 가게 앞 노점에 맥주 한 캔을 들고 앉았다.
용다리의 머리 부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쇼를 보기 위해서다.
우리 부부는 첫날 희중이 부부와 함께 걸은 산책길에 우연히 보게 되었지만 다른 친구들도 있어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가이드가 물벼락을 맞지 않은 만큼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일요일이어서인지 지난 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이 광경은 보고 싶은 쇼라고 짱아가 말했다.
9시가 되자 용머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역시 구경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보면 즐거움이 더 커진다.
그래서 걸 응원을 하고 복잡한 경기장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다.
 
가끔 사람들 속에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나는 사람이 많은 곳보다는 한적한 곳이 좋다.
사람 구경보다는 나무와 풀과 구름과 하늘, 바다를 보는 것이 편하다. 물론 옆에 아내와 함께라면 정말 좋은 일이다.
 
이렇게 또 하루가 베트남에서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