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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아들이 쓴 시

수놈은 노래한다

by 눈떠! 2007. 10. 6.

가끔 하얀 원고지는 막막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앞에 서있는 양. 말이 터져 나오지도 숨이 쉬어지지도 않게. 무언 턱 막혀버리는 것이.

한 줄기 글을 써내려가고도 싶지만 결국 펜을 놓은 채 그 압도적인 흰 색에 감탄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손은 다시 펜을 든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깊이에 감히 펜촉을 흘려본다.

지금. 머리를 흔들어 글을 짜내려는 사람과 말없는 원고지가 서로 머리싸움을 하는 밤. 귀뚜라미들의 노래가 귓불에 어른거린다.

그리고 세탁기 뒤에서 또 하나의 귀뚜라미의 울음이 들린다.

여름은 수컷의 계절일가. 낮에는 매미들이 목청을 높이고 밤이 되면 귀뚜라미들이 목소리를 뽑는다. 다리 여섯 개의 절지류 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귀를 두드려오는 것이다. 알다시피 노래하는 것은 수컷뿐이다. 암컷은 노래하지 않는다. 누구나 어렸을 때 형들을 따라 매미를 잡으러 갈 때 겪어보았을 것이다. 나무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매미들을 향해 형들의 긴 매미채가 살며시 움직이는 순간 나는 나무 아래에 붙어있는 매미를 발견한다. 내 키로도 충분한. 오른손이 슬쩍 움직인다. 숨이 저절로 멎는다. 매미채가 나무를 후려치는 동시에 고사리 손은 나무껍질을 향해 손을 날린다. 잡았다! 아쉬워하는 형들 몰래 등을 돌리고 내 손에 들린 매미를 바라본다. 역시나 벙어리매미다. 손을 놓는다. 녀석은 조용히 손을 떠나 날아간다. 잡으면 살려달라고 빽빽 소리를 지르는 수놈과 달리 조용한 암놈은 왠지 김이 빠져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매미채를 들고 설칠 나이도 아닌데.

귀뚜라미도 똑같다. 수놈은 울고 암놈은 울지 않는다.

지금 세탁기 뒤에는 아프리카 귀뚜라미의 수놈이 울고 있다. 토종과는 다르게 훨씬 더 목청이 크고 매미처럼 기계적인 목소리가 난다. 바다를 건넌 이 땅에 녀석이 찾는 암놈이 있을 리 없다.

사흘째 녀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었다. 세탁기 뒤에 무슨 먹을 만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무슨 힘으로 그렇게 울어대는지.

또랑 또랑 또랑 하고 녀석이 다시 울어댄다. 알아달라는 듯이.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아 달라는 듯이.

암놈은 없다. 죽을 때까지 저 녀석이 울어도. 이곳에 암놈은 없다.

그래. 암놈은 없다. 하지만 사랑은 있다.

나도 지금 원고지에 쓰는 이 글씨로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 수놈과 암놈 사이에 커다란 바다가 있듯이 나와 그녀 사이에도 커다란 바다가 있다. 깊이도 모르고 넓이도 모르는 바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저 너머에는 그녀가 있을 거라는 것.

이 녀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노래하는 것이다. 발 달린 것은 바다를 건너지 못해도 노래는 바다를 건널 것이다. 또랑 또랑 또랑 다시 녀석이 울어댄다. 박자 음정, 가사까지 모두 정확한 노래가 세탁기 뒤에서 우렁차게 울려나온다. 뱃속이 텅 빌수록 노래는 크게 나오는 법이지.

암놈은 없다.

하지만 수놈은 노래한다. 밖에서 귀뚜라미들의 합주가 그리고 텅 빈 집안에서는 귀뚜라미의 독주가 그리고 원고지 위에 나의 소리 없는 비파로.

밤하늘은 막막하게 어두웠다. 그것은 마치 원고지처럼 새카맣고 알 수 없는 해저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그 어둠위로 노래만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이다.

나의 그녀에게.

녀석의 암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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