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펼쳐보이기

파커 만년필

눈떠! 2022. 9. 22. 21:58

이 파커 만년필은 10여년 전 일본을 다녀오면서 시를 쓰는 작은 아들에게 선물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시인이 되고 싶기도 했고 어쩌면 시인보다 그 시절 글 쓰는 사람들이 하나쯤 가지고 있는 만년필이 참으로 부러웠었다. 특히나 파커 만년필은 내 로망이었다. 그러나 나는 파이롯트 만년필 정도로 만족해야 했었다.

그런데 4박5일 선생님 몇 분과 일본여행을 하고 돌아 오는 길에 다른 선생님들 따라서 아무 생각없이 들른 면세점에서 문득 눈에 띤 파커 만년필 앞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를 쓰고 있는 작은 애도 혹시 나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해서 큰 맘 먹고 질렀다. 집에 돌아와 선물이라고 내미니 표정이 덤덤해 조금은 섭섭했다. 사실 아들애는 불편한 만년필보다는 더 편하고 글도 잘 써지는 필기구가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만년필은 오랫동안 아이의 책상 서랍에 자고 있었다. 어느날 조심스레 너 만년필 안쓰냐? 라고 물어보니 예. 아버지 쓰세요. 해서 냉큼 가져왔다.

그런데 학교에 가져와 떨리는 마음으로 잉크를 넣다 떨어뜨려 써보지도 못하고 펜 촉을 부러트려 버렸다. 며칠을 망설이다 수유역 근처의 파커 만년필 서비스 센터에 가보니 수리하는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걸리고 또 요금도 만만치 않아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어느날 문득 만년필을 보게되니 이번에는 꼭 고쳐 쓰고 싶어 강남역 근처의 만년필 수리점에 직접 가져가서 고쳐왔다. 나로서는 참으로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한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나름 기분이 좋았다. 약간은 낯설고 설레기까지 했다.
비록 이 만년필로 시를 쓰지는 못 하고 이런 저런 중요치 않은 글을 쓰고 출석부에 수업 출결 표시나 하는 것이 전부지만 그래도 쓸데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아마도 이 기분은 만년필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살아있는 동안 계속 느낄 것이다. 비록 이루진 못 했어도 어린 시절의 꿈을 되돌아보는 일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시절을 추억으로 간직한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을 한다.

산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이런 물건들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만년필아 내게 와 줘서 고마워.
잉크를 넣고 글을 쓸 수 있어서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