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펼쳐보이기

퇴직 전 연가 첫날.

눈떠! 2022. 12. 26. 12:21

오늘부터 6일간 퇴직전 연가를 썼다.

그런데 연가 첫날 평소처럼 5시에 일어나 학교로 갔다.
 
어제 이것 저것 나름 짐을 챙겨 왔는데 가장 중요한 노트북을 두고 왔다. 교무실을 나오기 전 마지막 메신저를 확인하고는 다른 짐과 꽃다발, 선생님들과 재단에서 준 성탄 선물들만 챙겨서 집으로 와 아내와 저녁 산책하다 생각이 났다.
학교에 도착하니 우정의 탑 시계는 6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난 세월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불이 켜진 교사와 정원이 정겹게 다가왔다.
 
체육관 교무실에 들어가니 학교 보안관 선생님께서 막 가방을 내려놓고 계시다 아니 어떻게 나오셨어요? 고 물어 사정을 이야기하니 허허 웃으신다. 노트북을 챙겨 내려오다 주교무실 불을 보고 들어가 보니 교무부장인 구선생이 일을 하고 있었다. 부지런한 구선생은 학년말 마무리를 하느라 신새벽부터 고생이다.
교사를 나오니 박선생과 김선생님이 탄 산타페 차량이 들어와 주차장에 따라 내려가 인사를 나눴다.
이제 조금있으면 연구장인 홍선생이 올 차례다. 보통은 홍선생님이 가장 먼저인데 눈 때문에 차가 막히나보다.
아니 이 새벽에 할아버지는 왜 또 오셨어요 하는 김선생님의 기분 좋은 잔소리를 들으며 교문을 나섰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새벽 퇴근이라는 생각을 하며 교문을 나서 지하철로 향했다.
학교로 오는 전철은 그 이른 시간에 이미 빈자리가 없을만큼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볐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좌석은 수락산이나 불암산으로 가는 등산객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문득 아 이제 나도 저분들에게 합류해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니 8시 30분, 아내가 아침을 차리며 오늘 오후 3시에 재민이 실밥 뽑으러 을지병원에 다녀오셔야 해요 한다.
지난 월요일 손주 녀석이 집에서 뛰다 문고리에 이마를 부딪쳐 응급실에 가서 다섯 바늘을 궤맨 실밥을 오늘 푸는 날이라고 한다. 아들 내외가 모두 직장에 가니 아내가 하던 일인데 바로 내게로 넘어온다.
 
식사를 하고 잠시 쉬다 아내의 재촉으로 앞산인 수락산 무장애 길과 능선을 한바퀴 돌아 왔다.
산은 어제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혀 있었다. 부지런한 등산객들이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따라 중랑천 건너편의 북한산과 도봉산을 돌아보며 능선을 따라 중턱까지 올랐다 내려왔다.
능선 중간쯤에 있는 간이 의자에서 아이젠을 고쳐 신는데 뾰로롱 산새들이 모인다. 색깔이 예쁜 박새과의 곤줄박이 같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앉아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내 주위를 맴돈다. 아마도 등산객들이 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얻어 먹은 경험이 있나보다.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물 뿐이라 새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공연히 미안했다. 다음부터는 산새들 줄 비스켓이라도 넣고 다녀야겠다.
멀리 수락산 정상을 한번 바라보고 돌아 내려왔다.
 
집에 와 따뜻한 물 한잔 먹고 아내는 초등 이학년인 첫째 손녀 재아 마중을 나갔다.
요즘은 초등학교 하교 시간에 맞춰 엄마들이 교문에 마중을 많이 나온다.
교문 앞에는 엄마, 할머니 그리고 태권도장 관장님, 사범님들이 기다린다.
아이들은 엄마나 할머니에게는 그냥 안기지만 사범님, 관장님에겐 깍듯이 배꼽인사를 하며 큰소리로 관장님 사범님 안녕하십니까 한다. 아이들 예절 교육이 이제 부모나 가정에서 학원으로 넘어간 것 같아 무언가 모를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새월이 하수상한 탓인지 아니면 살기 좋아져서 인지 모르겠으나 손녀가 좋아하니 집사람도 가능한 마중을 가고 나도 데려가려고 한다. 실제로 개교기념일로 쉬는 날 아내를 따라 마중을 가서 50점을 받았다.
마중을 한번도 나오지 않은 할아버지와 아빠는 빵점이었다고 했다.
 
2시 40분 재민이를 데리고 을지병원 모자보건센터 성형외과에 가서 실밥을 뽑았다.
재민이가 지하철을 타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하부 차인 듬직이를 타고 가자고 해서 생전 처음 단둘이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뒷좌석에 안전밸트를 매고 얌전히 앉더니 하부 과자는 없어요 해서 청포도 사탕을 하나 물려 주니 좋아라 했다.
병원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1층에 올라가니 크리스마스 트리를 발견하고는 사슴 옆에 서서 사진을 찍으라고 해 찍어 보여주었더니 좋아했다.
재민이는 상황을 잘 이해하고 명랑하며 똑똑한 것 같아 하부로서 기분이 흐믓했다. 나는 고슴도치 하부다.
성형외과에 가서도 아는 글자를 읽으며 즐겁게 기다렸다. 진료실에 들어가서도 의사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신밥을 뽑을 때도 약간 긴장을 하긴 했지만 4살짜리가 울지도 않고 잘 진로를 받았다. 당연히 올 때도 사탕을 상으로 받았다.
다음에 하부 차를 타고 함께 여행을 가기로 약속도 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왕강희(어머니) 댁에 들려 물고기도 보고 꼬깔콘도 한봉지 얻어 먹었다.
 
집에 오니 5시가 넘었다.
저녁에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온천가루를 타고 들어 앉았다.
온 몸을 푹 불려 때를 밀었다. 때 밀어 본지 꽤 오랫만이다. 아내에게 때밀이 수건인 이태리 타올을 받아 빡빡 밀었다.
어릴 때 추석이나 설 전 동네 공중목욕탕에서 밀던 식으로 벌게 지도록.
등도 아내에게 부탁해서 시원하게 밀었다. 역시 뜨거운 물에 불려 때를 미니 조금 따갑긴 했지만 시원했다.
어릴 때 공중목욕탕 중간에 있는 커다란 욕조의 뜨거운 물 속에서 아저씨들이 아 시원하다 하는 소리가 새록새록 이해되는 지금이다.
하루 날 잡아 아내와 어머니 오시고 찜질방이라도 다녀 와야겠다. 사우나나 온천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피부가 따갑도록 깨끗이 밀어버린 때와 함께 새로운 삶의 첫날이 이렇게 지나갔다.
 
하루가 이렇게 가는구나.
퇴직하면 이렇게 살아가겠구나.
아내따라 시장가고 산책하고 손주들 보고 어머니 돌보면서.
세탁기 빨래 꺼내서 널기 좋게 탁탁 털어 종류별로 정리하고 다 마른 빨래 개서 종류 별로 정리하고.
빈둥빈둥 뒹굴뒹굴 거리며 이렇게 살아야지.
 
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