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예수님께서 우리 사이에 오신 날 전날.
토요일이기도 해서 늘 하던대로 어머니 모시고 큰아들 내외, 세 손주들과 작은 아들까지 모두 모였다.
요즘 어머니께서 속이 편칠 않으셔 음식을 잘 못드신다고 작은 아들이 전복 미역국과 전복죽을 끓였다.
올 해 들어 작은 아들은 자기가 요리에 취미가 있다며 퇴근길에 장을 봐와 엄마, 아버지 드시라고 국과 찌게를 끓여 놓곤 한다. 예전에 혼기가 찬 아가씨들이 하던 신부수업을 지금은 남녀 구분없이 하는 것 같다. 하긴 나도 설거지며 상차림, 빨래개기등을 자주하는 걸 보면 세상이 변하긴 하나보다고 생각한다.
가사를 나누는 일은 당연히 좋은 일이다. 실제 집안일을 조금 돕다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이런 티나지 않으면서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낸 아내가 대단해보인다.
작은 아들이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아내와 난 케익을 사왔다.
제과점에는 케익을 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둥근 상에 둘러 앉아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며 케익에 불을 붙이고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생일 축하노래를 불렀다.
아이가 셋이니 축하노래와 촛불끄기도 당연히 세번을 반복했다.
그리고 손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좋아할 법한 책을 각자에게 선물했다.
산타할아버지 선물은 오늘 저녁에 받을거라고 아이들은 기대에 들떠 있다.
아들 집 들어가는 현관 입구 크리스마스 트리 밑의 양말 속에 갖고 싶은 선물이 들어있을 거야 라며.
큰 아이가 초등학교 3-4학년 즈음에 산타는 없다고 동생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아내가 전해줬다.
이유는 산타 할아버지가 계시다면 그렇게 갖고 싶은 선물을 이야기해도 어떻게 매년 내복을 선물하냐는 거였다고 한다.
그러니 아마도 엄마가 산타일거라고 동생에게 설명하더란다.
하긴 나도 산타할아버지는 성당에만 계실거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아뭏튼 4대에 걸친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며 케익을 나눠먹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 생각한다.
주님께서 우리 가족과 함께 하시지 않다면 이런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하며 감사 기도를 드린다.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큰아들 내외와 손주들이 시끌벅쩍 자기들 집으로 돌아간 다음 변함없이 아내와 따뜻하게 옷을 차려입고 중랑천 산책을 나섰다. 사람이 다니는 길과 자전거 길은 눈을 깨끗히 치웠지만 산책길 주변과 뚝방 안쪽, 천변의 모래밭에는 하얀 눈이 그대로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날이 차서 인지 우리 부부 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흰 눈이 온 세상을 덮고 뚝방과 산책길 주변의 가로등이 환히 비추니 잡은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어가는 우리가 영화속 주인공인양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환갑이 지난 나이의 두 노인(?)이 러브스토리를 찍는 것 같은 분위기여서 보는 사람도 없는데 쑥스럽기까지 했다.
처음 만나서 데이트하던 가슴 설레던 추억부터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힘들었던 시집살이 이야기, 그리고 아이들 키우며 기쁘고 행복했던 이야기,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와 손주들 자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모두 잘 견뎌냈고 또 참 고맙고 잘 살았다고 서로를 위로하며 발 맞춰 걷는다.
결혼행진곡은 결혼식이 아닌 지금 이 순간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집에 돌아오니 작은 아들이 부추를 데쳐 접시 바닥에 깔고, 돼지고기 수육을 삶아 담고, 된장에 고추를 썰어 넣은 쌈장을 만들어서 집사람이 좋아하는 지평막걸리를 받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밥공기를 가져다 한 사발씩 따라 건배하고 들이키니 술이 아니라 보약이고 행복덩어리를 먹는 것 같은 기분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고 고마운 일이다.
소파에 기대앉아 거실 창밖 밤하늘을 바라본다.
2000여년 전 저 캄캄한 밤하늘에 큰 별하나 떠서 말구유에 누워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비추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성당에 꾸며진 구유의 예수님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어려서 내가 본 외양간과 소여물 통은 그렇지 않았다.
신심이 부족한 나이지만 그 광경을 생각하면 마음이 서늘해지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며 지금도 그리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자를 아버지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
주님!
제가 누리는 이 모든 행복이 저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소서.
당신 뜻을 깨달아 알아차리고 미약하지만 선한 일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욕심 부리지말고 주어진 것을 고마워하며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멀리 있는 모르는 사람까지 진심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제가 지닌 모든 것이 저의 힘만으로 얻은게 아님을 알고 있으니 비록 작은 것이라도 나누게 하소서.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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