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1.
104주년 3.1절이다.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시간에 3.1 독립 선언서를 외우면서 가슴 두근거리던 때가 생각난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 하노라. 차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여ᆢᆢ ᆢ"
독립 선언서를 외우며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자부심과 독립 운동의 피끓는 감동을 온 몸으로 느꼈다. 한자로 쓰여진 조금은 낯선 표현들이었지만 읽으면서 가슴 깊이 전해지는 전율을 지금도 기억한다. 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철학과 역사책을 읽으면서 특히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들에 관한 일화를 열심히 읽고 스크랩하고 기록했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조, 종례 시간과 수업 중 자투리 시간에 이야기 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이 63에 우리나라 대통령이라는 사람에게서 기막히는 3.1절 기념사를 들었다.
다시 언급하기도 싫다.
나는 평생을 전교조 조합원으로 살았지만 국뽕이다. 그래서 '조국과 민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참 어이가 없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오늘은 실제로 교단 38년을 마무리하고 맞은 첫날이다.
이제 동성고등학교 교사가 아닌 전교조 조합원이 아닌 은퇴한 자연인이다.
이제 나를 소개할 때 아내의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손주들의 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하면 끝이다.
퇴직 전 이제는 수학책을 볼 일이 없을 거라며 모든 책을 수학과 교실에 정리하고 왔다.
그런데 막상 실제 퇴직일이 다가오니 그래도 놀면서 취미삼아 머리 운동이라도 하고 싶어 근처에 사는 제자 전선생님께 부탁하여 기본서 한질을 받았다.
열심히 볼것이라 장담할 수 없지만 내일부터 여유있게 살펴 볼 생각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하더니 하루가 짧다.
헬스장에가서 운동하랴, 피아노도 좀 쳐야하고, 손녀하고 장난도 치고, 책도 뒤적거리고, 집안의 여러 물건을 버리고 재배치하다 보면 저녁이다.
어머니께 들려 오늘 보낸 이야기 좀 들어드리고 아들 집으로 가 손주들 돌보다 새아기가 퇴근하면 아내와 저녁 산책을 나간다.
돌아오면 씻고 잠자리에 들자마자 곯아 떨어진다.
나는 은퇴 체질이다.
특이하게 아내도 자기 눈 앞에 내가 있는게 마음이 놓이고 좋단다. 내가 살아 오는 동안 별 사고를 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내가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안정된다고 한다.
오늘도 중랑천으로 산책을 다녀왔다. 매일 두시간 가까이 걷는데도 이런저런 할 이야기들이 끝이 없다.
하긴 36년을, 아니 연애하던 시간까지 더하면 37년을 살았으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있겠는가.
우리는 1986년 1월 22일에 만나 10월 25일에 결혼했으니 9달 정도 애틋하게 만났다.
아내는 그 짧은 시절, 연애 기억의 적금으로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견뎌냈다고 한다.
힘들고 눈물날 때마다 광화문, 명동을 손잡고 걸어다닌 기억으로 이겨냈다고 한다.
사실 분위기 좋은 카페는 커녕 밥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무작정 손잡고 걷기만 했다.
그런데 아내는 그 기억으로 살아냈다고 하니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다.
그리고 언제 다시 해도 신나는 두 아들 키우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 레파토리다.
가진 것 없지만 자존심 강하고 뻣뻣한 공교육 교사인 애비덕에 과외는 커녕 학원 문턱도 밟아보지 못 했지만 두 아들은 엄마와 함께 읽은 엄청난(?) 독서량을 바탕으로 공부도 곧 잘 했다.
두 아들의 지금이 있기까지 모든 공은 99% 아내 덕분이다.
아이들 키우면서 내가 한 역할을 아버지가 있다 정도라고나 할까.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고맙고 미안하다.
시부모님 모시고 아이들 키우면서 알뜰하게 살림하느라 겪은 고생이야기를 하면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손주들 크는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10년 동안 옆에 살면서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으니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겠는가.
우리는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중랑천변을 누빈다.
그런데 반환점을 돌아오는 중에 아내는 서쪽 하늘의 빛나는 두 별을 발견했다.
바로 금성과 목성이다.
2023년 3월 2일, 내일 앞으로 2032년 5월 7일까지 9년간 이보다 더 가까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얼굴 맞대고 두 별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오늘 하늘에 금성과 목성 두별이 빛난다면 중랑천변에는 아내와 내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 왔고 살아 가고 살아 갈 것이다.
세월이 흐르니 나이먹고 늙어가겠지만 내 가슴속에 아내는 더 환하게 빛날 것이다.
아내 마음속에 나도 그렇게 빛나도록 지금부터라도 잘 해야겠다.
남은 세월 가능한 아내에게 집중하고 노력하면 평생 고생시킨 빚을 조금은 갚을 수 있을까나.
머리 위에는 반달이 떠서 우리를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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