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펼쳐보이기

흙길

눈떠! 2023. 3. 10. 12:33
사람 사는 곳에는 길이 있다.
 
내가 딛고 다니는 길은 서울의 보통 길이다.
보도 블럭이 깔려 있거나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거나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다.
흙을 밟을 수 있는 길은 일부러 찾아야만 심지어 비용을 지불해야만 밟아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집 뒤 수락산도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흙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한 목적이 있겠지만 야자 매트가 곱게 깔려 있거나 나무로 만든 계단이다. 심지어 2KM 가까이 산 밑으로 철골 구조에 나무판를 깔아 만든 무장애 데크 길을 만들어 어린이나 노인들도 편리하게 산책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매일 아내와 걷는 중랑천 산책 길도 흙 한번 밟지 않고 두 시간을 걸을 수 있다.
인도와 자전거 길은 아스콘으로 포장이 되어있고 중간 중간의 소규모 운동장은 조금 더 탄성이 좋은 우레탄으로 포장되어 있다.
천변의 꽃밭 주변 길은 야자 매트가 깔려 있다.
흙길은 어디에도 흔적을 찾기 힘들다.
 
갑자기 예전에 어른들이 뱀을 잡으면 자루에 담아 처마나 기둥에 걸어둬 땅 기운을 받지 못하게 하면 뱀이 기운이 없어진다고 하던 일이 생각난다.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흙으로 부터 분리 되어서 인지 나도 요즘 기운이 쇠해진 것 같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나이 먹어서 이리라. 하지만 흙을 밟아 본 지 정말 오래 되었다.
성경에도 하느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었다고 했으며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이 있는 것 처럼 분명 사람도 흙과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은데 우리는 흙을 소홀히 대하는 것 같다.
 
우리들이 어려서는 거의 흙과 함께 놀았다.
흙을 가지고 직접 놀기도 했지만 모든 놀이는 흙 바닥 위에서 이루어졌고 흙 먼지 뒤집어 쓰고 노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아니 흙과 떨어져서 놀 수 있다는 것이 상상이 되질 않는 시대였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흙이 조금만 묻으면 질색을 하고 놀이터 모래도 주기적으로 소독을 한다고 한다.
깨끗하고 위생적인게 좋은 것이라고는 알겠는데 정말 흙이 더러운 것 일까라는 의문은 떨칠 수 없다.
 
오늘 아내가 천변 운동장에서 에어로빅을 하는 동안 혼자 걷다 꽃밭 주변의 야자 매트가 없는 흙길을 발견했다.
맨발은 아니지만 운동화를 넘어 발에 전해지는 감촉이 사뭇 달랐다.
아스팔트나 보도 블럭, 야자 매트가 주는 느낌이 아닌 무언가 부드럽고 다정한 느낌이 발바닥과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지.
무어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 전 옛날 할머니 곁에서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보며 이야기를 듣는 그런 기분이다.
당장 없다고 살 수 없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슴 저 밑바닥에 묻어 두었다 어느 순간 슬며시 꺼내 보면 공연히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고향, 엄마, 소꼽 친구, 어깨 동무 같은 단어가 풍기는 그런 느낌.
 
나는 오늘 흙 길을 잠시 걸었다.
흐린 밤하늘을, 물결에 출렁이는 아파트와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봄을 준비하는 바싹 마른 풀잎들 사이로 흙길을 걸었다.
아내는 흙 한 점 없는 우레탄 포장 운동장에서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을, 아니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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