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교사 트레킹

2024.3.16. 세월호 10주기 전국 시민 행진 참가.

눈떠! 2024. 3. 17. 10:41
2024.3.16. 세월호 10주기 전국 시민 행진 참가.
한 달에 한 번 만나 둘레길을 걷는 오늘 마침 세월호 10 주기를 맞아 제주에서 출발하여 시민들이 걷는 행진이 서울에 도착해 그곳에 함께 하기로 했다.
10시 30분 시민행진단이 지나는 디지털단지 오거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길찾기를 검색하니 집에서부터 1시간 40분쯤 걸린다고 해 8시 40분 집을 나와 7호선을 탔다.
지하철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일본어 하습 프로그램을 들으며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도착했다. 5번 출구쪽 화장실에 들려 나오다 김 선생님을 만나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디지털 오거리에 미쳐 도착하기 전에 길에서 문선생님을 만나니 버스를 타고 오다보니 행진단이 이미 우리 약속 장소를 통과해 걷고 있더라 했다. 그래서 우리도 바로 여의도 쪽을 향해 고대 구로 병원 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고대 구로 병원까지 가는 길은 조금은 낯선 풍경이었다.
이 지역에는 조선족들은 물론 중국인들이 많이 산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도로변 간판들에 한자가 많이 보였고 건널목에도 한자로 차조심하라고 써있었으며 중국 음식점과 연변식 순대국밥집이며 노점상, 구멍 가게들도 조금은 낯선 모습이었다.
 
고대병원을 끼고 돌아가니 다시 눈에 익은 거리 모습으로 바뀌었고 구로 구청에서 쉬고 있는 행진단과 만났다.
생각보다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린이들도 포함된 꽤 많은 분들이 행진에 참여하고 있었다.
휴식을 마치고 문선생님께서 얻어 온 노란 조끼를 입고 출발하는 대열에 합류하여 선도하는 차를 따라 걸었다.
신도림역, 영등포역을 지나 여의도를 향해 인도 쪽에 면한 차로를 따라 구호도 제창하고 노래도 들으며 행진했다.
중간 중간에 시민들이 합류해 행진단의 규모가 조금씩 커졌다.
차로를 점하며 걸으니 당연히 차들이 불편을 겪었을테지만 몇 몇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가끔은 박수를 치며 호응해 주는 시민들도 있었다.
선도하는 차에서는 시민들에게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에 대해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며 두 사건에 대한 진실을 바로 찾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함께 기억하자고 구호를 제창했다.
그리고 두 사건을 통해 안전 삶을 누릴 권리와 필요한 법을 제정해야 함 주장하며 윤석렬 정부의 거부권 행사를 비판했다.
 
10년 전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미어진다.
당시 나는 2학년 부장을 맡고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갈 처지였었다.
2교시 수업을 들어가려는데 수학 여행 가는 아이들이 타고 있는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고 해 걱정 속에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전원 구조 되었다고 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전원 구조가 오보이고 뒤집혀진 채 뱃머리만 남기고 물에 잠긴 모습을 하루 종일 TV 화면으로 보며 가슴 조리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10시 30분경 침몰한 이후 희생자 295몀 실종자 9명이라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더구나 희생자의 대부분이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어서 내게는 더 충격이었다.
이동하지 말라는 선내 방송을 듣고 선샐에서 대기하던 학생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늘 질서를 지키고 선생님 말을 잘 들으라고 가르쳤는데 그런 아이들이 희생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친 것인지 회의가 들었으며 규칙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배에서 함께 죽었는데 선원들은 아이들에게 이동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을 하고 배를 버리고 탈출을 했다.
계속 나 자신에게 내가 그곳에 있었으면 어떻게 했을까를 질문하게 되었다. 아마도 평소 아이들을 지도하던 내 모습에 비추어보면 더 많은 아이들이 선실에 있었을 것이고 더 많은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하고 며칠 잠을 설쳤었다.
 
이 사건이 나기 전까지 우리 사회에는 안전에 대한 불감증이 만연했었다.
보통 사람들, 노동자들이 마음 놓고 삶을 영위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취약했었다.
그래서 다시 이태원 참사가 터진 것일 수 도 있다.
도대체 20세기 문명국에서 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압사할 수 있다는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이다.
그런 대형 참사가 일어났지만 전모가 낱낱이 밝혀지긴 커녕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데 절망감이 든다.
잘못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고 그에 다른 책임을 밝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제도적 장치를 구비하는 것이 올바른 사회가 아닌가?
그리고 그런 일들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 나는 살아있지만 언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지는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여러가지 안전망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여의도 KBS 사옥 앞에서 잠시 항의 집회를 했다.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그동안 일어났던 여러 일들을 다룬 다큐 방송을 하기로 했던 것이 이 정권 들어 사장이 바뀌며 방송 취소가 된 것이다.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취소를 했는데 총선은 4월 10 일이며 방송은 4월 18일 하기로 되어 있는데 말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가뜩이나 언론이 정권에 휘둘린다고 말이 많은데 살펴보면 정권 못지 않게 정권에 빌붙는 언론인들에게도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70년대 그 암울한 시대에 동아, 조선일보 기자들은 붓으로 독재 정권에 맞셔 싸운 찬란한 전통을 요즘 기자들은 알고나 있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한 때는 신문에서 봤다가 참이라는 증거였지만 지금은 신문에서 본 글의 공신력이 얼마나 될까 있기는 한가 의문이 든다.
작금의 KBS 사장단은 부끄러움을 배우길 바란다.
 
여의도 공원에서 점심으로 김밥을 나누어 주어 둘러 앉아 먹으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도 점심값 정도는 후원 해야겠다.
정 선생님께서 이곳에서 합류해 함께 김밥 먹으며 나이든 사람들 답게 옛 일들을 이야기했다.
이 여의도 공원에서 얼마나 많은 집회를 하고 교사대회를 했었는지 추억을 나누었다.
정 선생님, 나, 그리고 김 선생님, 문 선생님, 또 한 분의 김 선생님으로 시작된 동성고등학교 전교조 분회의 옛날이 떠올랐다. 전교조 깃발만 보아도 가슴이 뛰고 설레던 시절이 있었었다.
 
그런데 오늘 왜 그 많은 교사 단체들이 안 보이나 하고 투덜대는데 전교조 서울 지부 관악지회 깃발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그리고 다시 광화문을 향해 출발할 때 서울지부 깃발이 보이고 그보다 훨씬 커다란 전교조 청년위원회 깃발이 펄럭였다.
광화문을 향해 걷는 길은 전교조 서울 지부 기발 아래서 얼굴은 모르지만 조합원 선생님들과 함께 걸었다.
이 길을 이렇게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평화롭게 걸을 수 있는 날이 온 것도 나름 감명 깊었다.
방패를 들고 중무장한 전투 경찰과 회색 핼멧을 쓰고 검은 조끼를 입고 길다란 진압봉을 든 백골단과 마주하며 가슴 떨렸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혼자 감회에 젖기도 했다. 그렇게 광화문 근처 서울시 의회 앞에 도착했다.
여의도에서도 많은 시민 단체와 시민들이 합류해 이곳에 도착할 때는 제법 많은 사람들로 시민 행진단의 대열이 길어졌고 구호를 외치는 소리도 커졌다. 그런데 광화문에 가까울수록 주변 회사며 상가들이 휴일이라 문을 닫아 거리는 한산했다.
오히려 시의회 주변에 오니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시의회 주변에는 문화제를 위해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오늘 행진을 한 걸음 수가 삼만 보에 가까웠다.
 
문선생님께서 조끼와 작은 깃발을 모아 지휘부 차량 쪽에 반납하고 세종 문화회관 쪽으로 내려와 통닭과 맥주를 파는 가게에 자리 잡았다. 맥주 한잔에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보통 사람들, 소시민, 노동자, 소수자들이 마음놓고 안전하게 살며 작은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날들이 하루 빨리 오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