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2월 13일 증조할머니 기일 연도
원래 내일 음력 12월 14일이 증조 할머니 기일이어서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그렇지만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전통적인 제사를 카톨릭 제례 에식으로 바꿔 지내기로 정하셔서 새벽 미사에 연미사를 드리고 가족들이 저녁 시간에 모여 연도를 드린 후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버님께서 이렇게 바꾼 이유는 우리 집안이 카톨릭 신자이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제사를 모시려면 음식을 차리느라 집안 여자들 특히나 맏며느리가 하는 고생스러운 일을 줄여 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아내는 스물네살에 결혼하자 마자 설, 추석과 삼대 봉사로 6번 총 8번의 제사를 모셨다.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아내는 제사 지내는 것을 처음 경험하면서도 집안의 전통을 인정하고 묵묵히 견뎌내며 온갖 제사 준비를 했다. 집안의 제사가 음력 11월, 12월에 몰려 있어 한 달에 두 세번 제사 음식을 준비하느라 고생을 했다.
과일과 한과, 포, 정종 등은 장을 봐서 준비했다. 세가지 나물을 무치고 생전을 찌며 전을 부치고 닭을 쪄서 모양을 잡고 떡을 장만했다. 제사를 지내려면 적어도 삼 사일 전부터 하루 종일 분주하게 움직였고 제삿날 전날이나 그 날 아침부터시골에서 올라오시는 작은 아버지 식구들과 동생 식구들이며 친척들을 먹이느라 눈 코 뜰세 없이 종종거렸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이제 제사는 카톨릭 제례로 한다고 하시고는 전통적인 제사 음식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식구들 먹이는 일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제사 음식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이 많이 줄었다고 아내는 좋아했다.
상에는 영정을 모시고 가운데 고상을 올리며 초와 뽗, 그리고 커피를 한잔 씩 올렸다. 그리고 상 앞에 향을 살랐다.
그리고는 식구들이 둘러앉아 연도를 드렸다. 그동안 30여분 걸리는 긴 연도를 드리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몇 년 전부터 가족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업고 짧은 연도로 바꾸었다.
그리고 어느날부터 아내가 상 위에도 우리가 그날 먹을 음식 중 까끗하게 손질하여 올리기 시작했다.
주로 과일과 빵이며 과자, 그리고 그날 먹을 주 메뉴를 정성껏 올렸다. 언젠가 피자나 얀념통닭이 올라가지 않을까 한다.
내 생각이지만 제사는 가가례이니 다른 사람 눈치 볼것 없이 각 집안의 사정에 따르고 또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돌아가신 조상의 기일을 핑계로 그 후손들이 모여 돌아가신 분과의 추억을 공유하고 가장 중요한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오랫만에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 면서 친목을 다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이 바쁘게 돌아가니 일 년에 몇 번 모이는 것도 소홀히 생각하는 것 같아 조금은 허전하고 섭섭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도 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내 잘못인것을. 사실 나도 제사를 모시고 지내는 것을 누구한테 배운 것은 아니다.
어른들을 따라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나보다 하고 삶속에서 저절로 배웠다. 그 시대에는 모두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분명 예전보다 잘 살고 많은 것들이 편해지고 간단해졌지만 무언가 허전하고 잃어버린 무엇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다. 제사를 지내는 가장 중요한 정신이 무엇인가를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못했다. 편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허전함은 어쩔수 없는 나만의 감정이다.
부모, 형제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가친척들을 잃어버린다면 무엇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친구, 이웃으로?
하긴 이제는 제삿날이라고 해도 어머님 모시고 아들 형제들 뿐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동생이나 사촌들도 모두 자신들의 삶에 바쁘니 이것도 어쩌면 내가 마지막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우리 부부의 기일을 기억이나 할까?
아니 그날을 귀찮게 여기느니 보다는 기억하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자식들은 그들 나름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그들 나름의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터인데 내가 걱정하거나 할 일이 아니다.
얼굴도 뵙지 못했지만 철 들면서 사진으로 본 증조 할머니 제사를 모시며 이런 저런 상념이 가슴을 채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족이란 무엇일까?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었을까?
내일아침 새벽 미사에 증조할머니 연미사를 넣었고 큰 아들이 같이 가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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